내가 걸어온 소프트볼의 길
초등학교 6학년 봄, 나는 소프트볼 팀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자부심이자 동시에 큰 도전의 시작이었다. 혼성 팀에 속해 있던 나는 남자아이들을 제치고 주장 자리를 따냈다. 존경하던 선배에게서 물려받은 등번호를 받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건 내가 노력으로 쟁취한 등번호야.’ 유니폼 소매에 꿰매진 주장 마크의 무게와 자부심을 누구보다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소프트볼은 단순한 놀이나 취미가 아니라 내 마음의 버팀목이자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라운드 위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더 진지하게, 그리고 더욱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게 되었다.
나와 소프트볼의 인연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세 살 위 오빠의 연습을 보러 갔을 때 감독님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한 번 해볼래?” 아직 어리고 손도 작았던 나는 서툴지만 온 힘을 다해 공을 던졌다. 그 모습을 본 감독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빠보다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 한마디가 나를 소프트볼의 세계로 이끌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 아래에선 연습복이 땀에 흠뻑 젖었고 겨울 연습 때는 공을 쥔 손끝이 얼어붙을 듯이 시렸다. 힘든 연습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씩 팀을 떠나는 친구들을 보며 나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친구들과 놀 시간도 없이 오직 연습만 반복하던 시절엔 ‘왜 소프트볼을 시작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나를 붙잡아준 것은 한 살 위의 선배였다. 그 선배는 저학년 때도, 고학년 때도 주장 역할을 맡아 위기의 순간마다 꼭 안타나 홈런을 쳐내며 언제나 든든한 뒷모습으로 팀을 이끌었다. ‘멋지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어.’ 그 마음을 품고 나는 매일 스윙 연습을 이어갔다. 비가 오는 날도 하루도 빠짐없이 자율 연습을 하며 공원이나 집 거실에서 배트를 휘둘렀다.
경기 전에는 긴장으로 손이 떨리기도 했고 팀을 잘 이끌지 못해 속상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동경하던 선배처럼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실수하거나 실패했을 때일수록 더욱 큰 목소리로 팀원들을 응원하며 내 방식대로 노력했다.
중학생이 된 후에는 지역 클럽 팀에 들어가 전국 대회에 출전했다. 2년 연속 우승과 수많은 대회에서의 좋은 성적은 내게 큰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건 패배한 날의 기억이다. 경기 후 석양이 지는 운동장에서 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묵묵히 연습에 매달렸다. 그때의 아쉬움이 있었기에 나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클럽 팀에서는 경기 기술뿐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태도도 배웠다. 원정 경기에서는 식사 준비와 빨래까지 모두 우리가 직접 했다. 보호자의 도움 없이 동료들과 협력하며 실패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팀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몸으로 익혔다. 누군가를 위해 행동하는 것, 감사의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소프트볼을 통해 내게 배워진 것이었다.
학교 생활에서도 소프트볼을 통해 배운 ‘노력하는 힘’과 ‘동료와 서로 돕는 마음’은 큰 힘이 되었다. 예를 들어 공부가 잘되지 않을 때에도 ‘매일 꾸준히 하는 것이 힘이 된다’고 믿으며 틈틈이 자습을 이어갔고, 덕분에 어려웠던 과목에서 점수를 올릴 수 있었다. 또 조별 활동에서는 팀플레이 경험을 살려 친구들과 의견을 나누고 자연스럽게 모두를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소프트볼이 준 배움은 일상의 여러 순간에서도 나를 지탱해 주었다.
나에게 소프트볼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노력의 소중함, 사람들과의 따뜻한 협력, 자립의 어려움과 그 의미, 그리고 그 속에서 얻은 인연과 함께 성장해 온 기쁨이 모든 것이 내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내년부터는 자동차 생산 관리직으로 새로운 환경에 뛰어들 예정이다. 익숙하지 않은 일도, 잘되지 않는 일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노력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나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힘이 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그라운드에서 흘린 땀과 눈물이 앞으로 ‘인생’이라는 더 넓은 무대에서 빛날 것이라 믿는다.
니시하라 히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