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여, 영원하라
해마다 팔월, 집에서 몇 걸음 닿는 절의 종이 하루에도 몇 차례 고요히 울려 퍼진다. 아, 또다시 이 계절이 찾아왔구나 싶어 마음이 고요해진다. 둥~ 둥~. 느릿느릿 울려 퍼지는 저 종소리는 오봉 때 우리 조상님들이 돌아오실 적에 맞아들이는 신호이고, 아주 먼 옛날 전쟁 속에서 스러져간 그 많은 목숨들을 위로하는 진혼의 기도라 한다.
이 절의 종은 한때는 평화를 바라는 기도의 상징이면서도 군수 물자를 만들기 위해 나라에 바쳐졌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지금 이 순간 울려 퍼지는 이 소리가 얼마나 존귀한 것인가. 종소리는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누리고 있는 평화를 가만히 되새기게 하는, 더없이 귀하고도 아름다운 계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여름날, 나는 서울로의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
서울의 거리는 활기로 넘쳐흐르고 높은 빌딩과 세월을 품은 궁궐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나란히 서 있었다. 처음 마주한 한글 간판들, 사람들의 활기 어린 목소리, 그리고 골목마다 흘러나오는 진한 음식의 향기…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지만 마음을 설레게 하는 감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다 문득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일본의 종소리와는 어딘가 다른 그 울림이 자꾸 마음에 맺혀 이끌리듯 발걸음을 그쪽으로 옮겨 보았다.
그곳은 사찰을 닮은 건물의 한 모퉁이. 법의를 두른 스님이 장엄하게 종을 울리고 있었다. 일본의 종과는 분명 다른 울림이었으나, 틀림없이 “종”이었다.
일본의 종이 ‘둥―’하고 깊고 무겁게, 어딘가 와비사비의 정취를 머금은 소리라면 이곳의 종소리는 ‘댕―’ 하고 더욱 맑게 울려, 마치 가슴 깊은 곳에 조용히 말을 건네오는 듯하였다. 그 독특한 울림에 나는 그만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나라 사람들 또한 그 종소리에 기도를 실어 보내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바라보니 종루 곁에는 내 손주들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해맑게 뛰어놀고 있었다. 부모의 품에 안긴 아이들은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장중히 울려 퍼지는 종소리, 그리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모습을 바라보니, 일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손주들의 얼굴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종소리라는 것이 문화와 역사, 국경의 모든 차이를 넘어 곧장 사람들의 마음에 말을 건네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지난날의 슬픔을 어루만지고, 다가올 미래에 희망의 등불을 밝히는 보편의 빛과도 같은 것이라 여겨졌다.
이 절의 종 역시 전쟁의 참화 속에서 몇 번이고 자취를 감추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금 종은 힘차게 울려 퍼지며 시간을 알리고, 무구한 아이들의 웃음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이 얼마나 존귀하고도 소중한 일인가.
이 아이들의 눈에 비친 세상이 종소리처럼 맑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길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물론 내 손주들의 앞날 또한 그와 다르지 않으리라 굳게 믿고 싶다.
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도 절의 종소리가 울려올 때면 나는 언제나 서울에서 만난 그 종소리와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떠올린다. 종소리는 바다를 넘어, 국경을 넘어, 서로의 평화를 바라는 이들의 마음과 은은히 어우러지며 고요히 메아리치고 있다. 그것은 마음에 새겨진 진실이었다.
바라건대, 평화의 종소리여, 영원하라.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손주들이 어른이 되고, 또 그 아이들의 세대에 이르기까지, 그 맑은 울림이 이어져 가기를.
히라테 아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