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한국이 있어.”
-비비는 손끝에 담긴 한국-

  나는 웬일인지 큰아들이 밥을 먹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국수를 먹는 모습에 괜히 마음이 끌린다. 식사를 준비하자고 부르면 아무 말없이 자연스럽게 젓가락을 세로로 놓고 그 왼쪽에는 숟가락까지 빠뜨리지 않는다. 막상 먹기 시작하면 젓가락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손재주 좋게 면을 뚝딱뚝딱 잘 비빈다. 때로는 그 면을 젓가락에 돌돌 말아 한입 가득 넣기도 한다. 한국 먹방 영상에서 볼 것 같은 그 모습은 일본에서는 예의 바르지 않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왠지 정겨운 풍경이다. 마치 서울의 식탁에 함께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 아이에게서 왜 이렇게 한국 같은 느낌이 날까?

  아들은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지금까지 한두 번 정도 한국에 가 본 적이 있을 뿐이다. 집에서는 한국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학교 친구들이나 동네 친구들 중에는 중국인 친구는 있어도 한국인 친구는 한 명도 없고 줄곧 일본인 커뮤니티 안에서 생활해 왔다. 그런데도 아들은 카레를 먹을 때 후쿠진즈케(福神漬け)나 염교절임 대신 김치를 곁들이고 군고구마에는 버터 대신 김치를 같이 먹어야 제맛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이 아이의 몸짓이나 취향에는 신기하게도 ‘한국’의 분위기가 묻어나는 것 같다.

  아들이 이렇게 음식에서 한국의 맛을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모습을 보며 더 깊이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두 나라의 음식을 접해 왔다. 그런데 운동회나 소풍날에 제일 먹고 싶은 음식은 일본식 도시락이 아니라 아빠가 만든 김밥이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아들의 말을 들은 남편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심야 근무 후에도 김밥 재료를 정성껏 손질해 준비한다. 한국에서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단무지, 우엉, 햄 같은 김밥용 재료도 여기에서는 하나하나 직접 만들어야 해서 손이 많이 간다. 그렇게 공들여 준비한 재료를 접시에 가지런히 놓고 밥에도 간을 맞춘 다음, 이날만큼은 일찍 일어난 아들과 함께 둘이서 김밥을 마는 시간이 시작된다. 이게 좋다, 저게 좋다 하며 재료 주문부터 그날 일정 이야기까지 즐겁게 나눈다. 그리고 남은 재료를 다 잘게 썰어 밥과 비벼 비빔밥으로 먹을 때까지가 아들이 좋아하는 우리 집의 김밥 행사다.

  사실 나에게는 항상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아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제대로 물려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나는 아직도 한국어를 배우는 입장이라 자신이 없고 아들과의 대화는 늘 일본어로 한다. 한국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결국 한국적인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한 채 일본 사회 속에서만 자라게 하고 말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아이는 말보다 먼저 음식과 몸의 감각으로 한국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한국의 식문화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봄에는 봄나물로 반찬을 만들고 여름에는 복날이 언제인지 찾아보고 남편에게 삼계탕을 먹자고 제안했다. 가을 추석에는 집에서 전을 부치려고 재료를 사고 겨울 대보름에는 견과류를 먹었다. 가족 생일에는 케이크뿐만 아니라 꼭 미역국도 준비했다. 계절마다 무엇을 먹는지 내가 찾아보면 남편은 “그럼 같이 만들어 보자”라며 먼저 나서 주었다. 그렇게 하면서 아들은 나의 부족함을 넘어서 스스로 한국을 느끼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들은 어느새 언어가 아니라 맛과 습관을 통해 한국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내가 한국어를 공부하라고 강요한 적은 없지만 식탁 위에서 배운 것들은 말보다 깊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배움의 배경에는 언제나 한국인 아빠의 손맛과 사랑이 있었다. 우리 아들은 언젠가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할 것이다. 그날 그곳이 ‘이국’이 아니라 ‘정겨운 곳’으로 느껴지기를 바란다. 오늘도 면을 비비는 아들의 손이 조용히 말해 준다.

  “여기에 한국이 있어.”

야마나시 아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