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독서시간
몇 년 전 어떤 한국어 스터디에 참여하고 있던 나는 스터디 관련 콘텐츠 속에서 한 북클럽을 알게 되었다. 모집 내용에는 회원들이 모여서 책을 읽는 모임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 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어서 직접 문의하기로 했다.
안내에 따르면 북클럽은 한 달에 2번, 1시간씩 온라인으로 진행되며 정해진 일본어 원서와 한국어 번역판을 번갈아 낭독한다고 했다. 회원 가입도 무료로 할 수 있으며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으니 시간이 안 될 때는 톡으로 불참 연락을 주면 된다고 했는데 다만 책은 각자가 구매하는 것이었다.
나는 시험 삼아 참여하기로 하고 주최자에게서 다음에 읽을 범위를 안내받아 원서와 한국어판을 각각 전자책으로 준비했다. 실은 전자책을 이용한 것이 이때가 처음이다. 한국어판을 종이책으로 준비하려면 시간도 들고 비용도 들다 보니 둘 다 전자책으로 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폰에 앱을 설치하여 출퇴근길에 읽기로 했다. 원서는 화면 상의 글을 읽을 수밖에 없었지만 한국어판은 AI가 소리 내어 읽어 주는 기능이 있어 편했다. 알고 보니 한국의 전자책 앱은 대부분 책을 다운로드하면 오디오북 기능도 이용할 수가 있다고 한다.
10년 가까이 노안과 함께 지내왔던 나에겐 반가운 소식. 오디오북을 들으면서 간만에 섀도잉도 했다. 그 당시 AI의 음성은 그다지 완벽하지 않았지만 음악처럼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책을 읽을 수 있었으므로 몰입하기가 더 쉬웠다.
낭독회 당일 나는 이어폰을 끼고 온라인 회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카메라를 끄고 닉네임으로 참여하는 방식이었으니 너무 편할 수밖에. 참여자는 10명정도,주최자가 간단한 인사말 후 랜덤으로 읽는 사람을 지명하여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읽게 하였다.
놀랍게도 다들 쑥스러워하지 않고 감정을 실어 읽어 나갔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모두가 열정적으로 책을 읽었다.
내 순번이 왔다. 처음엔 긴장으로 두근거리던 가슴도 정성스럽게 글을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차분해지고 책 속 세계로 빠져 들고 있었다. 낭독이 이렇게까지 매혹적이라니!
그날부터 나는 북클럽 회원이 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세뱃돈을 받으면 제일 먼저 서점에 달려갔고 결말이 궁금해서 하루에 7시간씩 책을 읽는 날도 있었다. 반평생을 책과 함께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도대체 어느 순간부터 책을 멀리하게 된 걸까? 결혼하고 엄마로 살아가느라 바쁘다고, 직장 일과 집안일 때문에 정신이 없다고, 노안이 점점 심해져 간다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있었겠지.
북클럽은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나의 독서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반년이 지난 어느 날 이 즐거운 모임은 주최자 사정 때문에 끝나고 말았다. 가능하다면 나 자신이 주최자가 되어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이었고 솔직히 시작할 용기조차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지도 못하게 힘들고 고된 나날이 찾아오게 되었다. 남편이 중병에 걸린 것이다. 병세가 너무 심각해서 나는 일도 그만둬야 했다. 책은커녕 한국어 공부조차 할 수 없던 날들. 우리가 힘겨운 시기를 이겨내고 감사하게도 남편이 건강을 회복하고 내가 다시 일을 할 수 있는 일상이 돌아오기까지 1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조금씩 한국어 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이용하는 온라인 강좌 중에 한 북클럽 수업이 내 관심을 끌었다. 수업 소개에는 책을 한 권 읽고 그 중 일부 구절을 낭독하며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고 쓰여 있었다. 적어도 한 달에 한 권은 책을 읽을 수 있겠다 싶어서 신청하기로 했다.
첫 수업만은 제시된 책들 속에서 하나를 골라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요가에 관한 에세이를 골랐다. 그러면서 “요가는 제가 좋아하는 단어 중에 하나입니다”하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세상에 이런 실수를 하다니. ‘여가’와 ‘요가’를 헷갈렸던 거다. 책은 이미 구매한 후였다. 여가를 즐기는 여행기 같은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요가라니…어떡하지???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날 밤부터 유튜브를 보면서 요가를 시작했다. 이제 와서 한 말을 번복할 수는 없으니까. 과거에 요가를 시도했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한 지난날들이 떠올라 불안하지만 몸을 움직여 본다.
“숨 마시고 내쉽니다”
영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따라 호흡을 한다. 굳어진 몸은 쉽게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호흡에 집중하다 보면 왠지 몸과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다. 아사나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다음 날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밤에는 요가를 하고 아침저녁으론 에세이를 귀로 들으면서 계속 읽어 나갔다. 이렇게 한 달을 지냈다. 좀처럼 아사나는 잘 못하지만 날이 갈수록 깊은 호흡이 나를 위로해 준다는 걸 깨달았다. AI가 읽어주는 문장들은 마치 저자가 친구처럼 다정하게 속삭여 주는 듯했다. 나는 마음에 깊이 스며든 말들을 몇 번이고 읽었다.
견뎌 내야 할 시간 속에서 내 몸과 내 마음은 상상도 못할 만큼 지쳐 있었던 것이다.
이 책과의 만남은 착각에서 비롯된 기적이다.
그랬지. 책이란 항상 나에게 그런 존재였지.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마음에 와닿는 한마디를 전해주는 존재, 그 한마디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변화시켜주는 존재, 나를 위로하고 일깨워 주는 친구같은 존재. 이제 와서 알게 되다니.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구나. 너무 늦었지만 다정한 인사를 건네 본다.
안녕, 독서시간.
사카이 하나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