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내일로

  여행지에서의 우연한 만남. 아련하고 왠지 씁쓸해지는… 그래도 가끔씩 생각나 되새기다가, 다시 가슴에 묻혀 두는 어렸을 때 추억. 그런 것들을 “청춘”이라고 부르는 걸까?

  대학 3학년, 스물 한 살의 겨울. 한국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난 무렵에 “내일로”라는 철도 할인티켓을 이용해 한국을 일주하기로 했다. 남원에서 난생 처음 추어탕에 도전하고, 세계 5대 연안습지에 선정된 순천만 습지에서 바람에 흔들거리는 갈대밭 사이를 걷고, 여수에서는 시내버스투어에 참여했다. 지금에서야 “혼밥”이 흔한 한국이지만 그 당시에는 아직 음식점에 혼자 들어가기가 뭐 했다. 다행히도 나와 똑같이 혼자 참여했던 남자애가 말을 걸어준 덕분에 여수 명물인 서대 회 무침을 맛볼 수 있었다. 듣다 보니까 그 애도 “내일로”로 한국 일주 중이었고 고등학교 3학년이며 게다가 우리는 동네 친구였다.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친해진 우리는 저녁에 싱싱한 밥도둑 간장게장을 먹고, 언덕을 올라 돌산대교의 야경과 여수 밤바다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만난 지 반나절도 안 된 남자애와 나란히 야경을 보고 있다니... 드라마 같은 이 상황에 설레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한겨울의 바람을 맞으면서도 나는 들떠 있었다. 여수에서 헤어질 예정이었던 그 애가 남은 여정을 나와 함께 한다고 했을 때는 속으로 아싸! 를 외칠 정도였으니까. 경주에서 불국사와 첨성대, 안압지(지금은 “동궁과 월지”라고 불린다)를 보고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다니고, 다음날 아침 일찍 안동으로 출발해 하회마을을 보고 찜닭과 맘모스빵을 먹었다. 그렇게 나란히 무궁화호에 실려 서울에 도착한 우리는 다시 보자며 헤어졌다.

  그 약속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켜졌다. 몇 번 둘이서 놀러 나갔고 그 애 친구들과 같이 당구도 쳐봤다. 어느 날 둘이서 동네를 거닐다가 문구점에 둘렀다. 향수를 테스터에 뿌려 향기를 맡던 나는 “누나, 이거 괜찮지 않아?”라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그 애 얼굴이 있었다. 목에 뿌린 형수를 맡아보라는 뜻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 너무 가깝잖아…! 너무나 자연스러운 동작에 당황해서 말 그대로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드라마에서는 세계가 슬로모션처럼 보이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그건 거짓이 아니었구나 했다. 태연한 척 간신히 “응, 좋네”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너는 진짜 고딩이야?”싶을 정도로 본인이 아나 모르나 그 애는 자꾸 내 심쿵 포인트를 꾹꾹 찔렀다. 그 애에게는 당장 여자친구가 없는 것 같아서 은근슬쩍 나도 지금 솔로라고, 그래서 남친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내 딴에는 부담스럽지 않게 말해본 적도 있다. 다른 날 들른 카페에서 서로에게 “100일 후에 보내는 편지”를 썼다(그런 이벤트를 했었다). 내가 어떤 내용을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애가 보내준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00일 후 사랑에 배고프지 않은 여자가 되어 있기를 바래. 남자친구가 생겨도 나랑 놀아줘ㅋㅋ” 장난스러운 말투에 감싸서 내가 연애 대상이 아님을 전해준 것이다. 역시 눈치챘었구나, 내 마음을. 이런…

  시작하기도 전에 에둘러서 차인 바람에 혼자 괜히 창피해서 연락을 안 하게 되었다. 유학 생활이 끝난 것과 동시에 서먹해지고 지금은 연락처만 아는 사이다. 우리가 잠깐 스친 인연이 되어가는 동안에 나는, 성실하고 나를 아껴 사랑해주는 남자와 만나 이제는 두 아이 엄마다. 최근에 문뜩 카카오톡을 열었더니 그 애의 프로필 사진이 웨딩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귀여움이 남아 있던 고등학생은 이제 어른이 다 됐고 아주 행복해 보인다. 드라마처럼 사랑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운 한국 곳곳의 풍경과 맛있는 요리를 같이 맛보고 몇 년이 지나도 간직할 수 있는 “청춘”을 선물해 준 그 애에게 마음속으로 말한다. 이제 나도 사랑에 배고프지 않다고.

이와사와 시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