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이어준 인연

  내가 처음 한글을 접하게 된 것은 1997년, 여동생의 결혼식 초대장이었다. 여동생이 한국인 남자와 결혼하게 되어 서울에서 온 초대장은 한글과 한자로 쓰여 있었다.
  처음 보는 문자였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쉽게 번역할 수도 없었고, 한국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읽어본 기억이 있다.

  결혼식 전날, 우리 가족은 부모님, 할아버지, 삼촌, 나, 남편, 아들, 여동생의 친구들 총 10명이 전철을 갈아타고,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서울로 향했다. 결혼식 당일은 서양식과 한국 전통 결혼식이 함께 진행되었다. 서양식 결혼식은 양가 친척과 신랑 신부의 친구들 등 200명이 넘는 하객들이 참석하여 그 규모에 놀랐지만, 나는 한국 전통 결혼식과 의상에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새롭게 가족이 된 사람들과 앞으로 우리 여동생이 인생을 살아가는 나라의 언어를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나는 2000년에 돗토리현에서 개최한 한국어 초급 강좌에 참여하기로 했다. 현 서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주 1회 강좌를 받기 위해 현청이 있는 돗토리시까지 편도 차로 2시간 걸려서 3개월간 다녔다.

  다음 해, 강좌 수료생으로서 강원도와 서울에서 어학연수를 갈 기회를 얻었다. 돗토리현은 강원도와 우호 협정을 맺고 있어 상호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도청 직원들 중에서도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그렇게 한국어를 잘할 수 있게 되고 싶어서, 2003년에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 세 아이를 데리고 한 달간 서울에 머무르며 어학원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조금씩 한국어 실력이 늘어서, 한국 문화에도 관심이 생긴 나는 그 후 자주 한국 여행을 했다. 가끔은 혼자, 때로는 아이들과 함께 관광이나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보러 갔다. 한글이 적힌 문구류나 소품을 찾는 것도 내 삶의 낙이었다.

  어느 날, 서울 홍대의 한 공원에서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어 당시 6살 된 딸과 함께 갔을 때 그곳에서 한 여성이 아름다운 색의 한지 책갈피에 한글로 글자를 쓰고 있었다.

  "좋아하는 말이 있으면 한글로 써드릴게요."라고 하기에 나는 좋아하는 신승훈의 노래 가사 일부를 써달라고 했다. 붓으로 쓴 한글은 흐르듯 아름다웠고 나는 그 사람에게 감사를 전하며 소중히 가져왔다.

  시간이 지나 나는 SNS에 딸과 함께한 한국 여행의 추억으로 책갈피 사진을 올렸다. 그러자 친구에게서 "그분은 한글 서예가 최루시아 선생님이 아닌가요?"라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이번에 선생님이 한글 캘리그래피 책 출판 기념으로 오사카에 오시는데, 그분께 확인해 볼까요?"라고 했다. 나는 놀라워하며 친구에게 부탁했다.

  곧 답장이 왔다. 정말로 최루시아 선생님이 맞았다! 홍대 공원에서 만났던 그 여성이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소주 브랜드 '좋은데이'의 라벨 글씨 등 많은 광고 작품을 남기며 한국은 물론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 호주 등 전 세계에서 활동하시는 한글 서예가가 되어 있었다.

  2015년 3월, 나는 오사카로 향했다. 출판 기념 파티는 많은 팬들과 친구들이 모여 성대하게 열렸다. 루시아 선생님의 서예 퍼포먼스도 공개되었다. 먼 곳에서 왔다고 인사할 자리를 주셨다.

  나는 "8년 전 서울 홍대에서 책갈피에 한글을 써 주셨던 그분과 공통의 친구 덕분에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라고 한국어로 이야기했다. 너무 긴장해서 잘 말하지 못했지만, 루시아 선생님은 그런 나를 상냥하게 보시고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오랜 친구를 만난 것 같았어요."라고 말씀해 주셨다.

  지금은 SNS 친구가 되어 가끔 루시아 선생님의 활동 소식을 보고 있다. 얼마 전, 서울에서 손님들의 이름이나 좋아하는 단어를 그 자리에서 써서 티셔츠에 프린트하는 이벤트를 SNS에 봐서 나는 바로 선생님께 메시지를 보내고 동생을 통해 주문을 했다. 어떤 말을 써달라고 할까 고민하다가, "나답게"라는 말을 부탁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 티셔츠는 한지 책갈피와 함께 내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요시노 마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