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춤의 가능성
내가 어렸을 때 다니던 조선학교의 바자 날에 무대로부터 음악이 흘러나오면 어른들이 일어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특히 할머니들의 춤은 마치 너울너울 일렁거리는 물결처럼 무엇인가 큰 흐름이 보일 것 같았다. 그것은 할머니들이 살아오신 파란만장의 시대의 흐름이었을지도 모르고 또 개인적인 생활사 속의 세세한 일들의 흐름이었을지도 모른다. 흥에 취한 어깨춤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할머니들의 삶의 표현을 목격했던 셈이다.
나는 오사카조선고등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일본학교에 다녔다. 그러자 어깨춤을 볼 기회가 없어지고 봤던 기억도 희미하게 되었다.
기억이 되살아난 것은 오키나와의 대학에 다녔을 때였다. 한국어 이름을 밝히면서 생활하던 오키나와에는 재일조선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유학생이나 타이완인이라고 자꾸 인식 받았다. 한편 오키나와에는 자신을 일본 사람이 아니라 우치난츄(오키나와 사람)라고 긍지를 가지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대학교 바로 옆의 슈리성(首里城)에는 매일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여러 가지 언어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일들은 나에게 신선한 경험이었다.
나는 인도네시아의 전통 음악인 가믈란(Gamelan)의 동호회에 소속했다. 동호회 멤버에는 오키나와 학생들도 일본 각지 출신의 학생들도 있었고 근처에 사는 사회인들도 있었다. 인도네시아 음악을 인도네시아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더불어 악기 연습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나는 자기 자신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하는 개운치 못한 감정이 포근하게 풀려갔다.
7월 7일 대학교의 안뜰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가믈란 악기들로 일본의 칠석 전래 동요를 연주하기도 했고 오키나와의 발현 악기 산신 연주자와 함께 오키나와의 민요를 연주하기도 했다. 가믈란의 청동의 울림이 은하수 걸리는 밤하늘에 퍼져갔다. 다음날 출연자 모두로 바닷가에서 놀았다. 그러자 어느 한 사람이 산신을 치면 오키나와 사람들이 일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양 팔을 위쪽에 올리고 손목을 좌우로 대는 것처럼 멋지게 움직이면서 발은 모래사장을 디디고 있었다. 이렇게 환희가 넘치는 춤을 가차시라고 한다고 배웠다. 그때 내 머리 속에 어린 시절에 보았던 어깨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졸업 논문의 주제를 어깨춤으로 정했다. 장기 방학에 오사카로 돌아가 재일조선인 1세 할머니랑 조선학교 선생이랑 우리 가족을 인터뷰했다. 그리고 알게 된 것은 예를 들면 하나는 에깨춤을 출 때의 음악이나 노래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한국의 민요나 가요곡 만이 아니라 일본의 엔카로 춤출 때도 있었다. 생활 속에서 귀에 익힌 노래가 좋은 것 같았다. 또 하나는 어깨춤의 요소로서 노래, 춤, 함께 춤판을 벌리는 친구들, 그리고 마당이 부풀어 오르고 드디어 감정을 풀다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알았다. 또 하나는 재일조선인 1세의 춤은 굉장하다는 후생의 눈길, 2세의 춤은 겉시늉이라는 겸손인지 중동무이라는 열등감인지 그런 감정, 또 3세의 춤은 어색하다는 부끄러움과 어리둥절해 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의견이 있고, 4세, 5세가 되면 어깨춤을 모르고 본 적도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깨춤의 단절을 목격하고 있다.
1세의 춤이 대단하고 2세 이후의 어깨춤은 엉거주춤하고 진짜가 아니다는 의견이 눈에 띄지만 그런데 나는 생각한다. 무엇이 진짜냐 가짜냐를 추구하면 어깨춤의 본질인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놀이의 감각이 약해지는 것이 아닐까. 어깨춤의 중요한 요소가 갖추어지면 그런 축제성이나 공동체성을 현대에 재현하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 어깨춤을 바뀌어가는 문화로서 파악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할머니들이 어깨춤의 음악은 아무것이나 좋다고 말씀하시다시피 자민족의 전통만에 구애되지 말고 타민족의 음악을 경험해 보면 어떨까. 그리고 흥에 타면 몸이 자연히 움직이는 대로 춤 추거나 아니면 딴 사람의 춤을 흉내 내거나 해서, 춤추는 사람이 있고 그들을 보는 사람이 있고 서로 자유롭게 지내고 마당을 공유하면서 더불어 감정을 해방할 수 있으면 그것도 어깨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민족을 넘어가는 어깨춤에 가능성은 있다.
임순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