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발견

  우리 어머니의 고향에는 ‘스즈’라는 말이 있다. 노토 반도의 방언인데 나는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 이 단어는 옛날부터 상속받은 혈맥, 가계를 말한다. 예를 들면 멀리 사는 사촌들과 이야기할 때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이 비슷해서 놀란다. 그럴 때 “역시 우리는 스즈구나."라고 말한다. 부모와 자식 사이, 자매 사이에서 이런 부분이 자주 나타난다. 자신이 닮고 싶었다거나 그런 성격이 되고 싶었다고 생각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우리 아버지는 누구에게나 싹싹하게 말을 거신다. 이웃 사람에게는 물론 산책을 하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신다. 스포츠 시합을 보러 갔을 때에도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말을 거시고 스포츠 선수를 큰 소리로 응원하며 즐거워하신다. 우리 언니도 그런 점이 아버지와 비슷해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도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는 한다. 나는 콘서트나 뮤지컬을 보러 갔을 때 언제나 옆에 앉은 사람에게 말을 걸어 보고 싶지만 좀처럼 그렇게 할 수 없다. 또한 좋아하는 배우의 팬미팅에 갔을 때도 무대에서 선 배우가 던지는 질문에 큰 소리로 응답하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작게 목소리를 낼 뿐이다. 이럴 때 나는 아버지의 성격을 닮고 싶어진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나에게 일본의 오래된 노래를 인터넷으로 찾고 싶다고 하셨다. 왜 오래된 노래를 찾는지 물어보니 어머니가 속한 글쓰기 소모임에서 노래를 부르게 됐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부끄럽지 않냐고, 긴장되지 않냐고 물어보니 어머니께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셨다. 우리 언니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 가끔 텔레비전에 노래자랑 참가자 모집 안내문이 나오면, 갑자기 신청할지 말지 고민하며 수선을 피운다. 나에게는 그런 고민 자체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이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사원 여행을 갔을 때, 사장님께서는 나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하셨다. 아무리 동료들 앞이라고 해도 누군가의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한심해 보일지 몰라도 온 힘을 다해 사양했었다. 이렇게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나도 결국 ‘스즈’이다. 텔레비전 방송국의 노래자랑 프로그램에 참가 신청을 한 언니와, 사람들 앞에서 긴장하지 않고 노래를 부른 어머니처럼 나도 사람들 앞에 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같은 환경에서 자랐는데도 우리 네 남매 모두 성격이 다르고 얼굴도 다르다. 오빠는 차분하고 느긋한 성격인데 남동생은 다정하고 부드러운 성격이다. 어머니의 큰 눈과 쌍꺼풀, 아버지의 하얀 피부는 언니가 물려받았고 나는 어머니의 희지 않은 피부와 아버지의 실눈을 닮았다.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한탄하면 어머니는 나에게 항상 “아버지를 닮은 딸이 반드시 행복해진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렸을 때 사람들이 "자녀분들이 서로 안 닮았네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 부모님은 "아버지가 모두 다르니까요."라는 농담을 하셨다. 일부 그 말을 믿은 사람도 있었을 같은데 아버지를 닮은 나는 확실히 아버지의 딸인 셈이다.

  이런 나도 작년에는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한국어 글쓰기 대회에서 입선으로 뽑힌 것이다. 어머니는 학생 시절부터 시를 쓰셨고 지금은 글쓰기 소모임에서 활동하며 신문 등에 투고도 하신다. 언니도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는 등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나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독서 감상문을 쓰면 ‘좋았다’, 영화 감상문에서는 ‘재미있었다’, 맛에 대한 평가도 ‘맛있었다’라고 간단하게 적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는 나에게 글솜씨가 없다고 생각하시고는 자신의 투고문을 보여 주시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글쓰기 재능이 나에게도 조금 있었던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돼서 정말 기뻤다.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나에 대한 발견이 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올해 들어서 또 다른 하나의 발견이 있었다. 요즘 나오기 시작한 뱃살이다. 우리 어머니와 똑같다. 이것도 바로 ‘스즈’이겠지?

다네 미나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