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는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고요엔이라는 곳에서 자랐다. 슈쿠가와, 구라쿠엔, 고요엔은 한적한 인기있는 주택가다. 나는 2살 때부터 대학 1학년, 성인이 될 때까지 고요엔의 훌륭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었다. 집은 작은 독채로 비슷한 크기의 집들 세 채가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붙어 있는 구조였다. 이웃끼리는 모두 친해서 부인들은 서로를 집으로 초대해 자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파일럿, 방송국 임원, 금융맨, 의사 등 직업면에서도 엘리트들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고베 산노미야에서 그 당시로는 드물게 수입한 고급 부인용 구두를 취급하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재일한국인 2세로 어머니도 재일한국인이다. 부모님은 오사카의 한국인 부락 같은 곳에서 일본의 상류사회로 옮겨온 것이었다. 내가 아는 한 내 주위에 한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무려 나조차도 한국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다. 부모님은 학교 선생님께 우리 가족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품위 있는 일본인들로 둘러싸인 생활에 한 사건이 일어났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 주택가는 길 폭이 굉장히 좁고 주요 도로에서 진입하는 길목도 차 1대만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협소했다. 그런 길 한쪽에 작은 주점이 생겼는데, 그 주점을 방문한 손님의 차가 길을 막고 주차돼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 슈쿠가와 역에서 한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셨기 때문에 날마다 큰 불편함을 느끼셨다. 그날은 아버지가 어두운 안색으로 귀가하셔서는 장남인 오빠에게 “히로! 야구 배트 가져와!”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냐고 하시며 오빠를 집에 있으라고 하신 후, 잠옷 차림으로 아버지와 함께 나가셨다. 아버지와 주점의 손님 사이에서 주차 문제로 마찰이 발생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3, 4학년이었던 나도 뒤를 따라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웃 사람들도 멀리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구경 중이었다. 상대편 인원수가 많아서 아버지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어머니도 가세해 아버지를 돕고 계셨다. 얼마 후 경찰이 오고 상항은 정리됐다.
다음 날부터 아버지의 역습이 시작됐다. 근처에 주차금지 표식을 세우고 경찰이 순찰을 강화하는 등 주민의 생활을 유지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 주점은 낮에만 영업하는 다방이 되었다가 얼마 지나 없어졌다. 이웃 사람들은 아버지 덕분이라고 감사해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부모님의 출신에 대한 소문이 퍼져갔다. 초등학생이던 나를 붙잡고 자세한 집안 사정을 들추려는 아줌마도 있었다. 그 때는 몰랐다. 재일한국인이고 오사카의 한국인 부락 출신이라고 크게 소문이 나면서 부모님께서 괴로운 입장에 처하게 되셨을 줄은. 부모님은 고요엔을 떠나기로 결심하셨다. 이사할 때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는데 부모님께서 넓은 땅을 찾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일본인으로 귀화했다.”라고. 확실히 한국인이라고 듣게 된 날은 내가 일본인이 된 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느끼고 있었다. 할머니는 일본어가 아닌 언어로 말씀하시고, 때로는 일본말을 못하는 아저씨가 다른 나라에서 찾아오셨고, 할아버지는 “일본 사람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신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마음은 한국인이라고 복잡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부모님의 오랜 집 찾기의 결과는 고베의 오카모토라고 하는 고급 주택가로 한신 지역의 야경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내가 대학 1학년 때로 아버지는 구두가게 외에도 파칭코 가게를 함께 운영하셨는데 그 당시 사업은 순조로웠던 것 같다. 어른들도 들어갈 큰 수영장이 딸린 250평이나 되는 집을 보고 주위 사람들은 칭찬과 질투를 담아 ‘백악관’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들이 분명 뒤에서는 다른 나쁜 말을 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어른이 된 후 조금씩 재일한국인의 입장을 알게 된 나는 국적은 일본인이지만 일본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작은 자존심을 가지게 됐다.
히라카와 나오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