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운 여름
언제부터인가 여름이 별로 기다려지지 않아졌고 오히려 제발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제발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가득해져 있었다. 왜인지를 유심히 생각해 봤더니 여름을 대하는 나의 기분이 여름을 꺼리게 만드는 것 같았다. 어릴 때만 해도 여름방학을 이유로 여름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 내가 있었지만 어른이 되니까 그 여름방학을 대체해 주는 다른 이유가 필요한데 아직 못 찾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여름은 여름이 기다려지는 이유를 찾기로 결심했다.
원래 좋아하는 것에 연관시키는 방법이 가장 빠르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한국 문화이다. 한국 문화를 통해서 보이는 여름이면 다시 여름이 좋아지고 기다려지게 되지 않을까 싶은 기대를 하고 한국으로 떠났다.
먼저 여름 하면 떠오르는 음식인 콩국수를 먹어봤다. 하얗고 꾸덕꾸덕한 콩물은 한입 먹으면 몸 구석구석에 영양분이 채워져 가는 기분을 들게 해줬다. 단순한 요리 같지만 먹을 때마다 맛있음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보기에는 절대 화려한 음식은 아니지만 먹어보면 행복이 묻어 나오는 신기한 음식이다. 여름뿐만이 아닌 가을에도 겨울에도 봄에도 1년 내내 팔아줬으면 좋겠다. 그래도 여름에만 판다는 제한적인 점은 이 음식을 더 맛있게 해 주는 것 같았다.
다음은 여름 하면 떠오르는 간식인 미숫가루를 먹어봤다. 전통시장에 가서 주인아저씨에게 “미숫가루 한 잔이요”라는 말과 동시에 천 원을 꺼냈다. 그러면 주인아저씨는 얼음이 동동 떠 있는 큰 통을 국자로 몇 바퀴 섞으신 다음에 종이컵에다가 미숫가루를 가득 퍼주셨다. 한국의 추억의 맛은 일본인인 나는 아쉽게도 알 리 없지만 그래도 그 추억을 나도 알고 싶은 마음에 아는 척하며 마셔 봤다. 시원한데 고소한 맛은 자꾸 마시게 되고 순식간에 한 잔이 비워졌다. 아무리 가득 퍼주셨다고 해도 한 잔으로는 역시 아쉬웠고 마음 같아서는 배부르게 마시고 싶었다.
배가 채워져서 그런지 확실히 여름이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제 여름 하면 떠오르는 풍경을 찾으러 나갔다. 여름 하면 어떤 풍경이 떠오를까. 뭉게구름과 백일홍이 바로 떠올랐지만 더 예쁘고 특별한 풍경을 찾아내고 싶었다. 오로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으로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한 주택에 자연스레 피는 능소화가 떠올랐다. 능소화는 원산지가 한국이 아닌 식물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스러운 풍경 속에 같이 어우러지면 정말 예쁘다. 능소화 명소를 쉽게 찾아가 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고 그곳을 찾아갔지만 아쉽게도 이미 져있어서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그냥 골목골목을 걸어 다니며 구경하고 있다가 운 좋게도 어느 주택에 예쁘게 펴있는 능소화를 발견했다. 꾸며져 있지 않고 자연스레 펴있는 그 모습은 내가 찾고 있던 풍경 그대로였다. 정말 예뻤고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선물같이 갑자기 나타나 줘서 기쁨은 두 배가 됐다. 나중에 알았지만 조선시대에는 양반집 정원에만 심을 수가 있었다고 양반꽃으로 더 알려진 꽃이라고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희소해서 더 예뻐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 풍경에서 좋은 기운까지 얻어온 기분이 들었고 어렵게 찾아진 만큼 소중한 추억으로 남겨졌다.
이렇게 오로지 한국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름을 만끽했다. 한국의 여름을 마음껏 즐겨 보니까 아주 만족한 상태가 되어있을 줄 예측하고 있었지만 예측과 달리 나에게는 많은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아쉽다고 하면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은 꽤 긍정적이며 큰 힘이 숨어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국어사전에는 미련이 남아 서운하다는 뜻으로 나와도 내 머릿속의 사전에는 미련이 남아 설렌다고 나온다. 아쉬움은 나를 또 한 번 그곳으로 찾아가게 만든다. 여름을 기다리게 만드는 이유인 아쉬움이 많이도 생겼다. 기다려지지 않았던 여름이 이제는 기다려지는 여름이 됐다. 찬란했던 한국의 여름은 내 마음속에 아로새겨졌고 가을이 지나 겨울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게 변함없이 찬란했으면 좋겠다.
나가타 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