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나식당의 단호박전
유학 생활도 1년이 지나고 귀국을 앞둔 6월, 여동생이 서울에 놀러 오게 됐다. 계획을 세우려고 먹고 싶은 음식을 물어보니 동생은 “단호박전”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고민했다. 나 자신도 아직 서울에서 단호박전을 만난 적이 없었다.
단호박전은 우리 자매에게 추억의 음식이다. 그래도 나는 그때 어렸던 동생이 여전히 단호박전을 기억하고 가장 먼저 꼽을 정도로 그리워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어떻게든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아야겠다.
그 과제는 생각보다 일찍 해결됐다. 단골집인 맛나식당의 사장님에게 이야기해 봤더니 “내가 만들어 줄게”라고 흔쾌히 말해줬던 것이다. 좋아하는 맛나식당에서 먹을 수 있다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맛나식당은 쾌활하고 싹싹한 사장님이 혼자 꾸려나가는 아담한 식당이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콩비지찌개, 계란탕… 뭘 먹어도 다 맛있지만 나는 비빔밥을 자주 주문했다. 사장님은 매번 주방에서 “완숙이야? 반숙이야?”라고 계란 프라이의 굽기 정도를 물어준다. 이런 사소한 순간에 가정적인 따뜻함을 느낄 수 있어서 가족을 떠나서 혼자 이국에서 생활하는 나에게는 마음을 힐링해 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식탁에 푸짐하게 차려진 반찬도 다 맛있다. 갈 때마다 다른 종류의 반찬이 나온다. 물김치, 계란말이, 어묵볶음, 애호박볶음, 멸치볶음, 깻잎 쌈밥… 몰랐던 맛을 만나게 해주는 이 식당도 나에게 일종의 학교다.
거리의 색깔이 선명해지고 여름의 기운이 느껴지는 무렵, 동생이 서울에 왔다. 서울역에서 동생을 마중하고 내가 사는 동네에 간다. 맛나식당의 유리문을 열면 붉은 앞치마를 두른 사장님이 늘 그랬듯이 눈웃음을 짓고 맞아 주셨다. 동생은 이번 여행을 위해 외워온 첫 번째 한국어를 선보였다.
“반갑습니다!”
사장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단호박전을 구워 가져와줬다. 오늘만의 특별 메뉴이다. 우리를 위해 시장에서 단호박을 사 와준 사장님을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뭉클해진다.
단호박을 주인공으로 한 주황색 전은 기대 이상의 맛이었다. 단호박의 내추럴한 달콤함과 부추의 고소함. 노릇노릇하게 구운 반죽은 바삭하고 은근히 해물 육수의 향이 났다. 어렸을 때 먹었던 단호박전과는 또 다른 맛이었지만 만든 사람의 다정함이 듬뿍 담긴 점은 똑같다.
생각해 보면 나와 한국의 인연의 시작은 초등학생 때 ‘양상’이라고 부르던 아줌마가 만들어준 단호박전이었다. 재일교포 2세인 ‘양상’은 야간학교 국어 교사였던 우리 어머니의 학생이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일찍부터 취직을 한 그녀는 60세 나이로 처음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고 담임교사인 어머니와 친해졌다.
그 시절 가끔 양상이 만들어 주는 낯선 이름의 한국 음식이 식탁에 올려지면 비일상적인 느낌이 있고 설렜던 기억이 난다. 그중에서도 우리 가족에게 특히 인기가 있는 반찬이 단호박전이었다. 양상을 통해 한국 문화를 알게 되고 한국어나 한국무용을 배우기 시작하며 취미의 세계를 넓혀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을 때 양상은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도저히 못 가겠다”라고 해서 장례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연락이 끊긴 지 15년이 지났지만 어딘가에서 잘 계실 거라고 믿고 있다.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이야기해 보고 싶은 것이 많이 있다.
“언젠가 한국 여행을 하겠다”라는 어머니의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내가 그 꿈을 이어받고 끊임없이 확장하는 중이다. 분명히 어머니도 같이 한국 유학 생활을 즐기셨을 것이다.
사장님은 어머니의 이야기도 자주 들어주셨다. “이 식당의 단골손님은 신기하게 아픔이 있는 사람이 많다”라고 사장님은 말했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아픔을 안고 살아가기 마련이고 사장님의 포용력과 따뜻한 밥이 위로가 되어, 그들의 아픔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양상의 단호박전이 나의 시작이 되어줬던 것처럼 사장님의 단호박전도 앞으로 계속 나의 힘이 되어줄 것이다.
맛나식당의 유리문을 열며 동생이 외워온 두 번째(그리고 마지막) 한국어를 선보였다.
“잘 먹었습니다!”
고야마 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