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에서야 알게 된 것
저는 30년 전에 아마가사키에 있는 간호 전문학교에 다녔습니다. 학생 생활 마지막 병원 실습에서 80살 남성 환자를 만났습니다. 제가 처음 만난 한국인이었어요.
환자는 젊었을 때 일본에 오셨습니다. 일본어는 매우 능숙하게 말할 수 있지만 읽기나 쓰기는 거의 못했습니다. 그래도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가족들과는 일본어로 이야기를 했어요. 가족들은 모두 환자를 소중하게 생각했어요. 저는 선배 간호사에게 한국인들은 가족을 매우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듣고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이 맞았습니다.
옛날에는 아프더라도 고령자에게 적극적으로 수술을 권하지는 않았습니다. 위암 진단을 받은 그 환자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가족들의 강한 바램이 있어서 수술을 받았어요. 하지만 수술 직 후 갑자기 원인불명 심폐정지가 되었습니다. 의사가 가족들에게 상황을 설명했을 때 가족들은 “선생님, 절대 여기서 그만두지 마세요! 아버지가 목숨을 건지실 때까지 심폐 소생을 계속해 주세요”라고 강하게 호소했어요. 한 시간 반 동안 심폐 소생을 계속해서 기적적으로 환자의 심장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의 강한 바램이 통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위를 다 적출한 그 환자는 생각만큼 식사를 할 수 없었어요. 가족들은 매일 환자를 위해서 죽이나 좋아하는 반찬을 여러 가지 만들어 병원으로 가져왔어요. 환자와 가족들은 무엇보다 ‘먹는 것 ‘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잘 먹는 것’ 이 회복을 위해서 가장 좋은 일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병원 실습 중 저는 실습과제로 환자 수술 후 생활이나 식사 시 주의점 등을 열거한 설명서를 작성해야 했어요. 하지만 환자는 일본어를 읽을 수 없습니다. 저는 한국어를 모릅니다. 환자에게 설명서를 전달했을 때 “그냥 거기에 두세요. 나중에 누군가에게 읽어달라고 할게.”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일본어를 읽을 수 있는 며느리분에게 제가 쓴 내용을 설명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안타깝게도 실습 기간이 끝났고 저는 더 이상 환자를 만날 수 없게 되었어요.
결국 그 설명서는 사용되지 않았어요. 퇴원 직전에 상태가 급변하여 환자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4년 전에 우연히 본 한국 드라마에서 흘러나온 노랫소리에 완전히 빠져들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에 한국어 교실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한국어를 통해서 한국의 문화나 생활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처음으로 한국에 갔다 왔어요. 제가 일본인임을 알면 누구나 일본어로 인사를 해주거나 감사의 말을 해 주었습니다. 한마디라도 말해줬을 때는 고맙고 기뻤어요. 외국에서 듣는 모국어가 이렇게 안심감을 주는지 몰랐습니다. 상대방의 언어를 말하는 것은 의사소통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임을 깨달았어요.
한국어 공부를 하게 되면서 저는 가끔 그 환자와 가족이 떠오릅니다. 한국인들은 어르신들을 공경하고 가족들을 매우 소중히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식사할 때 가정에서도 식당에서도 많은 반찬이 나옵니다. 인사로 “밥 먹었어?”라고 할 정도로 식사를 소중히 합니다. 그렇게 상대방을 자연스럽게 챙겨요. 그 환자를 떠올릴 때마다 환자는 오랫동안 일본에 살았어도 한국의 문화가 뿌리내린 사람이었다고 새삼스럽게 느낍니다.
30년 전 설명서를 작성해야 했을 때 왜 저는 그 환자와 가족들에게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을까요? 그 당시 저는 시간도 마음에도 여유가 없었어요. 한글도 본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그 환자에게 단어만이라도 배워서 같이 쓸 수도 있었어요.
그때 저에게는 이해하려는 자세가 부족했어요. ‘좀 더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까?’ 이제 와서 후회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간호사로 있습니다. 하지만 그 환자에게서 배운 것은 인상에 남아 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저는 한국과 신기한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언젠가 천국에 계실 환자분에게 “저는 한국어를 배우고 있어요. 이제 한국어로 설명서를 쓸 수 있게 되었어요.”라고 보고할 수 있도록 공부를 계속해 나가려고 합니다.
사와타니 카즈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