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
나의 할머니는 메이지 시대에 태어나셔서 내가 24살 때 9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한국 사람으로,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일본에 오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한국에 계실 때 학교에 다니지 못하셨다. 일본어를 모르셔서 평생 한국어로밖에 말씀 못하셨다. 그래서 나와 이야기하실 때는 부모님이 통역해 주셨다. 그것은 정확하지 않았지만 나는 ‘간다’나 ‘누가’와 같은 간단한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할머니께는 세 딸과 두 아들이 있었다. 위의 딸 둘은 한국에 살았다. 장남은 30대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40살 때 낳은 막내 아들이라 우리 아버지를 아주 귀여워하셨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보다 연하신데 머리가 좋으셔서 한국에서 학교에 다닐 당시에 월반하셨다고 한다. 머리가 좋고 학자 같으셨지만 돈은 잘 벌지 못하셨다. 할머니는 공부를 하실 기회가 없었지만 생활력이 뛰어나셨다. 전쟁 중이라 식량 부족이 심했던 때에도 어렸던 아버지는 한 번도 배고픔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산에 가서 고사리를 캐거나 여러 가지로 궁리하셨을 것이다. 할머니는 작은 밭에서 상추, 가지, 시금치 등을 기르셨다. 내가 어렸을 때 여름방학에 놀러 가면 할머니는 나를 조금 떨어진 밭까지 데려가 밭에 난 잡초를 뽑게 하거나 강에서 빨래를 하시는 것을 도와드리게 했다.
할머니가 기르던 야채는 모두 맛있었는데 특히 상추가 최고였다. 작은 상추에 구운 고기를 싸서 먹는 것은 최고였다. 오이도 귀신 오이라고 부를 정도로 크게 자랐다. 한 달에 한 번은 시골에 사시는 할머니 댁에 갔는데 꼭 좋은 고기를 사 가지고 가서 풍로에 구워 먹었다. 밥을 먹을 때 할머니는 항상 “많이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항상 물 대신에 일본 술을 드셨다. 어느 날 물을 잘못 보고 할머니의 술을 마셔 버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정말 깜짝 놀랐다.
할머니는 체격이 크시고 관록이 있는 분이셨다. 정말 한국의 할머니 다운 느낌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쭉 혼자 사셨다. 걱정이 된 아버지가 오사카에 와서 같이 살자고 말씀드려도, 할머니는 밭이 걱정된다고 하시며 평생 혼자 사셨다.
만년의 할머니께는 오직 한 가지 관심거리가 있었는데, 당시 재수생이었던 남동생의 대학 수험이었다. 할머니는 옛날 분답게 여자아이보다 남자아이를 더 귀여워하셨다. 특히 우리 남매는 여자 3명에 남자 1명이었기 때문에 남동생을 아주 귀여워하셨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는 게이오 대학교에 합격한 것을 들으시고 “좋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시며 춤까지 추셨던 것도 기억이 난다. 더욱이 할머니께서 손자가 합격한 대학교가 얼마나 좋은 학교냐고 물어보셨다니 교육열이 높은 할머니셨던 것 같다.
할머니의 마지막은 포근한 봄 같은 2월의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조금 떨어진 밭에 시금치를 수확하러 가셨는데 머리가 아프다고 하시더니 이웃에게 약을 받아 드신 후 마당에서 햇볕을 쬐다가 돌아가신 것 같다. 할머니는 수의도 미리 준비하고 계셨다. 저승길을 떠날 때 건넬 노잣돈이 든 주머니까지 준비해 놓으셨다. 만반의 준비를 끝내 놓으셨던 것이다. 우리 할머니 다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던 다음 날 먹은 된장국마저 잊히지 않는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수확하신 시금치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 와서 한국어 공부하는 것을 보고 우리 할머니는 뭐라고 하실까? 분명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면서 싱글벙글 웃는 표정으로 힘내라고 말씀해 주실 것만 같다.
고사카 마유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