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버스를 타서
“상운아, 오늘 너의 아버지를 닮은 사람을 봤지. 날카로운 눈매와 ‘저기’ 하고 나를 부른 나직한 목소리까지 판박이였어. 응 내가 알바하는 한식당에서. 근데 너는 잘 지내고 있니? ”
전화로 이런 이야기를 할 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전화가 아니라 문자라도 되겠다. 그러고 보니 무언가에 설레거나 기뻐하거나 놀래거나 했을 때에는 나는 빠짐없이 그에게 연락을 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20대 와중에 5년이라 짧은 시간이 아니다. 마치 코앞에 나를 태워줄 기차가 왔을 때 그럴 듯 연애를 했다. 그러다가 뛰어오른 그 기차는 나를 전혀 모르는 또 다른 세계에 데려갔다. 눈부시게 변화를 지속하는 창밖을 5년 동안이나 봤더니 어느 때 갑자기 그 기차가 나를 팽개치고 혼자 가버렸다. 이제 잊어버리기에는 오랜 시간이 흘러갔다. 그런 사랑을 했었다.
멍하고 있더니 술집이 문을 닫는 시간이 다가왔다. 맥 빠진 이어폰을 귀에 꼭 꽂었다. 설거지를 한 다음에 테이블을 닦고 청소를 해야 한다. 학교는 개강을 맞이하고 취준을 해야 할 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나는 혼자라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라 소원에도 가까운 믿음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를 닮은 어떤 손님은 어느새 계산을 마치고 한식당은 나가 있었다.
장어, 양꼬치, 삼겹살, 꽃게, 회, 낙지볶음, 감자탕, 초밥… 그와 그의 아버지와 나는 주말마다 밥을 같이 먹었다. 그의 아버지는 만날 때마다 나에게 밥을 사주시고 그러실 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잘 챙겨주시는 건가 늘 신기했다. 밖에서 저녁을 먹은 후 마트에 들러 과일을 사다 집에 돌아갔다. 깐 수박이나 귤, 사과, 포도, 파파야 같은 과일들이 접시 위에서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고 나는 그런 과일들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누군가와 같이 밥상을 둘러싸 먹는 과일이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가끔 과일을 안주로 삼아 술을 드셨다. 주말을 그렇게 지내다가 일요일 해 질 녘 서울을 향할 고속버스를 타고 신림동에 있는 자기 원룸에 돌아가는 것이 나의 짧은 유학 생활의 일상 중 하나였다.
사는 집은 어떻냐. 잘 먹고 지내냐. 텔레비전이 없다면 내가 하나 사줄까. 그의 아버지는 나를 오버하게 걱정해 주셨다. 우리가 처음에 만난 날에는 근처에 큰 식물원이 있다고 나를 데려가 주시고 거기서 관엽식물과 꽃을 하나 사주셨다. 신림동에 돌아간 나는 그 식물들을 전자레인지 옆과 창문 앞에 예쁘게 보이도록 꾸몄다. 내가 방 안에서 움직일 때마다 흐르는 공기에 따라 몸을 흔든 아레카 야자와 히아신스가 띠는 봄의 은은한 향기가 나의 방을 감쌌다.
형편이 어려운데도 유학을 포기하지 못했던 나를 보고 그의 아버지는 결코 적지 않은 원룸의 보증금을 다 내주신 것이었다. 가족이 아닌데도 왜 그렇게 잘 봐주시는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은 나에게 그는 ‘돈을 준 게 아니라 투자하는 거지. 리턴은 새 발의 피만큼 이겠지만.’라면서 웃어 보였다. 혼자 생활하기에는 신림동이 치안적인 문제가 많지 않을까 걱정하셨지만 결국 위험하거나 무서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지금 잘 지내고 계실까.
이제 만나지도 못하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나에게 들여준 정이 수두룩한 게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는데. 한 번 감사의 말이나 하고 싶은데 이제 뻔뻔하겠고 어색한 것만 같았다.
내가 품에 가지는 이런 마음만이라도 바다를 건너 그 집까지 둥둥 떠다니면 좋았을 텐데. 어버이날에 상운을 통해 돈이나 보내드릴까 싶었는데 그가 몰래 갉아먹을 것 같아서 그만 보내드리기로 했다. 괜히 정리한 사람이랑 언제까지나 연락을 하는 일이 아니니까. 그래도.
“괜찮을 거야. 나는 혼자라도 괜찮을 거야.”
어느 때 혼자 있을 수가 없어서 기댄 사람들에게 “고맙다” 그 한마디를 편하게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시절의 고마움이 이제 와닿는 어설픈 나였으니까.
언젠가 내가 아르바이트 하는 집에서 집에 가는 길에서 화장실에서, 또 다시 그를 닮은 사람을 본다면 그때에는 다시 한번 안부를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안녕하십니까. 잘 지내고 계십니까?”
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