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아버지

  아버지가 종활(終活)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날 때를 대비해 자기 물품들을 마구 버리기 시작했다고.
  아버지 본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아버지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한 적이 거의 없으니까.

  아버지는 무엇보다 외출을 싫어하셨다.
  내가 어린 시절 함께 외식한 기억은 딱 두 번이다. 나는 삼 형제였고 할머니도 함께 동거하셨기 때문에 가족도 많고 외식을 하게 되면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보단 아버지의 성향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외식했던 그 두 번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중 한번은 가족 모두 제사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바로 집으로 가려는 아버지에게 할머니가 “가끔은 맛있는 것도 먹어야지!” 하며 우리의 손을 잡고 식당 안에 들어가 버리셔서 어쩔 수 없이 가족 모두 외식을 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한 번은 그때 보다 더 전의 기억이다. 그날은 나와 동생, 그리고 아버지뿐이었는데 어쩌다가 밖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무엇을 주문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우리보다 늦게 들어온 손님의 식사가 먼저 나오니 아버지가 점원을 불러 큰 소리로 야단을 친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가게를 나와버렸다. 음, 이것은 정확히 외식을 한 것이 아니네요.
  그렇다. 아버지는 불퉁스러운 사람이다. 불같이 화를 내신다. 식사 중에 한눈을 팔다가 국물이라도 쏟아버리면 거침없이 때리셨고 식사 시간이나 밤에 전화가 걸려오거나 집에 사람이 찾아오면 상대가 누구든 폭언을 하셨다.

  외출을 싫어하는 불퉁스러운 아버지.
  그런 아버지는 늘 무섭고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나는 아버지를 피하는 것 같다. 이것이 나와 아버지의 현실적 관계이다.

  그런 나와 아버지의 관계 중 가장 특별했던 것은 10년 전에 제주도에서 올린 나의 결혼식이었다.
  아버지는 결혼식 참가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는 것을 역시나 싫어하시는 것 같았다. 당연히 그렇겠지. 무엇보다 외출을 싫어하시는 아버지인데…. 물론 여권도 없다. 하지만 아들의 결혼식이다. 안 갈 수는 없다. 이렇게 해서 나는 외출을 싫어하는 아버지를 모시고 제주도까지 가게 된 것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한국에서 아버지가 또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시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면서 아내의 친족분들을 소개해드리고, 나의 친구나 선생님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마지막 날에는 함께 제주도 관광을 하면서 사진도 찍었다. 아버지는 역시나 과묵하셨지만 모든 행사를 무사히 마쳤다. 식장에서 양복 차림의 늠름해 보이는 아버지. 아내가 시키는 대로 폭포 앞에서 부끄러워하면서 어머니 어깨에 팔을 두른 아버지. ‘박물관은 살아있다’에서 장난꾸러기 표정으로 신나하는 아버지. 나에겐 결코 익숙하지 않은 아버지의 그때의 사진들을 볼 때마다 쓴 웃음이 나온다. 항상 집에만 있던 아버지가 제주도 자연 속에서는 활기가 넘쳐있다. 다시 생각해도 기적 같은 시간이었다.

  벌써 10년이 지났다니. 그 시간은 아버지 인생에 무엇을 가져다줬을까. 아니 나와 아버지의 관계에 무엇을 가져다 줬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바 그 후로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행도 안 다니셨고 제사를 제외하면 외출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여전히 가끔 폭언도 하신다. 변함없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 변함없이 거리를 두는 나. 제주도에서의 특별한 시간은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다.

  종활을 시작하셨다는 아버지. 이대로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끝나는 걸까. 끝나버리겠지. 이대로 간다면.
  아버지가 바뀌길 원할 수는 없다. 변해야 하는 건 나 자신일 테니. 아무것도 아닌 날들이 그때처럼 특별한 시간이 되도록 나 자신이 변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한 한 발로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일본어로는 부끄러우니까 먼저 한국어로. 아버지가 모르는 한국어로. 하지만 나의 마음은 아버지에게 꼭 전달될 것이라 믿는다. 이 글을 쓴다는 것이 다름이 아닌 나 자신을 바꾸려고 하는 시작이니까.

  “아버지, 난 아버지가 무섭지 않아요. 다음에는 용기 내서 한마디 걸어볼게요. 그러니까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다하라 아키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