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막의 암호

  세종대왕은 민중에게 문자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 국민들을 위해서 만들었던 이 문자가 현재처럼 바다를 건너서 세계 사람들에게도 친숙해질 문자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에서 태어난 내가 처음에 한글을 문자로서 인식한 것은 중학생때 고향인 후쿠오카에서 여자 배구 아시아 선수권이 개최된 때였다. 이 대회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예선을 겸해 9개국이 출전했다. 결과는 일본팀이 우승, 중국팀이 2위, 한국팀이 3위로 돼서, 다른 예선과 합쳐서 3팀 다 올림픽에 출전하게 됐다. 덧붙여서 말하면 올림픽에서는 중국팀이 금메달을 땄다.

  나는 당시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한 배구부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지만 국제대회 등 큰 시합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지방에서 국제대회를 개최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없는 기회라고 생각해서 배구부 친구와 함께 시합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 날의 시합은 대한민국 대 대만, 일본 대 인도네시아였다. 우리에게는 그 대회가 처음 보는 국제대회였기 때문에 너무 흥분했다.

  흥분한 탓인지 실은 시합 내용에 대해서 잘 기억이 안 난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다. 첫째는 일본팀이 인도네시아에 이긴 것, 둘째는 관객석에서 시합을 보고 있었던 일본 남자 국가대표팀 감독과 함께 사진을 찍은 것, 셋째는 한국 응원단의 현수막이다.

  한국 응원단은 관객석에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 현수막에는 한자로 ‘韓国’ 이어서 가타카나로 ‘フトスト’ 라고 쓰여 있었다. 일본어로 읽으면 ‘韓国 후토수토’이다. ‘후토수토’라면 암호처럼 의미를 가지지 않지만, 그 소리가 웃겨서 의미를 모르는 채 오랫동안 계속 기억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 후 한글을 볼 일이 한동안 없다가 2003년에 들어 다시 한글을 볼 기회가 왔다. ‘겨울연가’를 비롯한 한국 드라마이다. 처음에는 화제가 되었으니까 한번 보자라고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고, 배 용준씨 팬의 열정에 공감 못 했다. 하지만 드라마 ‘천국의 계단`을 보고나서 나도 한국 드라마에 빠져 버렸다. 버스를 잡으려고 놀랄 만큼의 기세로 달리는 권상우 씨. 성원을 보낼 뿐인 아줌마 팬이 되고 싶지 않아서 한글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기호로 밖에 보이지 않던 한글이었지만 문제집을 사서 아이 우유 같은 간단한 단어부터 외워 권상우도 한글로 쓸 수 있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중학생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배구 응원단의 현수막에 쓰여 있던 암호 ‘韓国 후토수토’. 시간이 지나면서도 그 소리는 머리속에 남아 있었다. 지금이라면 가타카나가 아니고 한글로 읽을 수 있다. ‘韓国フトスト’가 아니고 ‘한국 가자’였다. 아, 그런 의미였구나. 20년 걸려 겨우 이해가 됐다. 의미를 가지지 않았던 소리가 말로 변화한 순간이었다.

  10월 9일 한글 날. 세종대왕은 국민들을 위해서 만든 문자가 한 외국인에게 말을 읽는 기쁨을 준 것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권상우 씨의 팬미팅에는 2번 참가했지만 지금은 열정이 식었다. 배구도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만두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도 한국어를 계속 공부하고 있다. 암호를 해독한 기쁨을 잃지 않고 앞으로도 한글 공부를 계속해 가고 싶다. 자 가자! 깊은 한글의 세계로!

미야모토 미치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