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꽃 계절에 생각나는 사람
오랜만에 혼자서 산책하다가 어느 집에 등나무 꽃이 피어 있다는 걸 알았다.
등꽃들이 레이스 장식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거기에 끌려갔다. 몇 개나 달려 있는 꽃송이들을 보니까 어떤 사람이 떠올랐다.
대학 3학년 때 입원했던 병실에서 만난 할머니였다. 당연히 편찮으셔서 입원하셨을 텐데 눈이 반짝반짝하고 항상 호기심이 많은 멋진 분이셨다. 나도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당시 나는 면역력이 떨어져서 외출은커녕 옥상조차 못 가서 여간 답답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자주 복도에 있는 퇴창에 앉아서 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비가 오는 날도 날씨가 좋은 날도.
어느 날 그렇게 한참 밖을 바라본 후 병실에 들어갔더니 그 할머니랑 어떤 아주머니가 병실 가운데에서 얼굴을 맞대고 뭔가 상의하고 있었다.
내가 방에 돌아오지 않아서 찾으러 가야 하는 게 아니냐고 상의하고 계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나를 걱정해 주셔서 찾으러 가자고 하셨는데 아주머니는 내가 간섭을 받기 싫어하는 걸 아셔서 망설이고 있었다고.
그런 분들과 함께 지내다가 내 몸이 점점 나아졌다.
외출 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된 어느 날, 그 아주머니가 할머니랑 셋이서 외출하자고 했다. 마침 등꽃 계절이니까 등꽃의 명소에 가자고.
우리는 여자들끼리 의기양양하게 나가서 레이스 커튼인 듯한 등꽃을 만끽했다. (앨범에 붙인 한 사진 속에서는 그 할머니가 내 어깨에 멋지게 팔을 돌리고 계신다. 그 사진 옆에 어린 내 글씨로 ‘즐거움을 나눴다’라고 쓰여 있고.).
그 조금 전부터 나는 병실에서 1000 피스의 조각 퍼즐을 하고 있었다. 넓은 하늘 밑에 펼쳐지는 라벤더 밭의 퍼즐이었다. 나는 침대 위에 골판지 한 장을 펼치고 퍼즐을 했다. 퍼즐을 안 할 때는 침대 밑의 바닥에 치웠다.
할머니는 조금씩 완성되는 퍼즐을 보는 걸 좋아하셨다. 그리고
“다 완성하면 축하하러 고급 호텔의 카페에 가서 차 한 잔 하자. 내가 사 줄게.”
라고 말버릇처럼 하셨다.
근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할머니의 말씀이 좀 부담스러워서 곤란했다. 할머니 마음은 고마웠지만 퍼즐이 완성될 때쯤에 대학교에 몇 번이나 다녀야 했다. 한 번 외출하면 녹초가 돼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할머니랑 나갈 체력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몇 번 말을 돌려서 거절했는데도 할머니가 계속 가자고 하셔서 짜증이 난 기억이 있다. 나는 이렇게 쉽게 피곤해지고 내 병에는 피로가 정말 안 좋은데, 할머니랑 외출할 힘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데 왜 이해해 주지 않나 싶었다. 아마 마지막에는 체력이 모자라서 호텔에 놀러 갈 수 없다고 명확하게 말했을 것이다. 그때 할머니의 실망하신 얼굴이 생각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결국 내가 먼저 퇴원하게 됐다. 근데 나는 한 달에 한 번 통원했을 때마다 할머니를 만나러 병실에 올라갔다. 할머니는 점점 몸 상태가 안 좋아지셔서 혼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셨다.
어느 날 내가 병실에 갔더니 며느리 분이 곁에 계셨다. 할머니는 겨우 낸 목소리로
“아야코랑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자리 좀 비켜 줘. 너 식사라도 하고 와.”
라고 며느리 분한테 말씀하셨다.
며느리 분이 떠나신 후 내가 좀 자랑스러운 기분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거냐고 물어 봤더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내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아서. 그래서 식사하러 나가게 한 거지.”
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그렇게 힘드셨을 때 며느리를 배려하신 거였다.
그게 내가 할머니를 만난 마지막이었다.
할머니랑 호텔 카페에 갈 걸 그랬다.
지금도 후회한다. 내가 조금 더 노력했다면 그때 함께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때가 아니면 갈 수 없었는데.
예쁜 등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앞으로도 등나무 시렁에 등꽃이 피어 있는 걸 보면 그 할머니가 생각날 것이다. 내년도 내후년도 등꽃을 보면 멋지고 호기심이 많으셨던 그 할머니를 생각할 것이다.
‘내가 더 잘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앞으로도 아프겠지만, 그래도 그 할머니를 마음에 품고 사는 것, 그리고 등꽃 계절마다 그 분이 생각나는 것도 행복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시다 아야코